#문학(혹은 예술)에서의 해석의 자유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서 본 글은 지극히 개인적인 주관으로 작성된 글임으로, 별도의 논쟁은 받지 않습니다^^;]
최근 아이유의 Zeze라는 곡으로 시작된 논쟁이 뜨겁다.
우리는 과연 이 논쟁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는 걸까?
1. 아이유의 'Zeze' vs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제제"
사건의 발단을 살펴보면, 소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에서 등장하는 5살 제제(Zeze)에서 모티브를 차용해서 아이유가 곡을 썼다고 하는데, 소설 속 제제는 어린 시절 학대를 당한 아픔을 가진 소년인데, 이 소설을 읽은 아이유는 제제를 통해 소설과는 다른 동명의 또 다른 인물을 창조했다고 한다. 흔히 문학이나 그 밖의 수 많은 예술에서, 이러한 모티브를 따오는 차용은 일찍부터 사용되어 오던 방식이고 그것이 특별한 문제를 야기하진 않는다. 하지만 이번 아이유의 신곡 "Zeze"가 사회적으로 꽤나 큰 대립(pros vs cons)을 초래한 것은 차용으로부터의 '재해석의 범주는 어디까지 가능한가(Socially Acceptable)?'에 대한 논쟁이라고도 생각해볼 수 있다.
여론을 보면 꽤나 많은 평론가(진중권, 허지웅 등)와 가수(윤종신..)들이 '표현의 자유'를 언급하면서 확대 해석을 경계하는 논조로 말을 쏟아내고 있지만, 국내에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를 번역/출판한 '동녘'을 비롯한 일부 작가(소재원, 이외수..)는 재해석에도 지켜야 할 선이 있다고 반박하고 있다. 받아들이는 대중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에게는 어떠한 영역이든 관계 없이 지켜야 할 선(Cross the line)이 분명이 있다. 생뚱맞게 법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우리는 법치주의 국가에 살고 있지만 또한 관습법이라는 사회가 정해 놓은 선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존재이다. 적어도 이번 일에 대한 내 견해는 우리 사회가 돌아가는 이치와 거의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이슈로 돌아가보면, 노래 속의 제제가 소설 속의 제제와 동일 인물은 아니지만, '우연히 새롭게 등장한 인물로 봐야함이 옳은 것인가'라는 질문에 아이유 조차도 분명 "No"라고 말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분명 소설을 읽었을 일부 대중들(소설을 읽지 않고, 전혀 관심이 없는 대중들은 어쩌면 이 논쟁에서 자유로울지도 모른다)에게는 이미 제제에 대한 공감과 연민을 가지고 있을 개연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제제를 성적인 대상으로 묘사한 노래 가사와 마치 핀업걸걸(2차 대전 당시, 미군에게 성적 환상을 자극하는 여성들의 사진, 그림)처럼 포즈를 취하고 망사스타킹을 신고 있는 제제의 모습을 보면서 '아, 소설의 제제와 아이유 'Zeze'는 다른 인물이었지..'라고 기대하는 편이 옳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다. 이는 그들에게 불쾌감을 주고, 문제 삼을 수 있는 충분한 단서를 제공한다고 보는 편이 맞다. 그리고 원작자(여기서는 노래의 작사가인 아이유)가 미처 그것을 의도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억울하다고 항변할 지라도 미리 예상할 수 있어야 했다. 대중가수 한 명의 신곡에 대해 이렇게 큰 이슈가 되는 이유는 '불쾌하면 컨텐츠를 소비하지 않으면 된다'는 단순한 논리가 아니라, 아이유라는 가수가 가진 존재감과 영향력, 그리고 최근 우리사회에서 대중 문화의 파급력이 주는 효과가 엄청 크다는 반증일지도 모른다.
세상 모든 것에 금기와 불문율이 어느 정도 존재하는데, 하물며 예술에서 그러한 금기가 없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표현의 자유와 상상력의 한계를 구속한다는 일부 의견에 대해서도 역시나 동의하지 않는다. 금기와 한계는 어디까지나 다른 이야기이며, 원작에 대한 재해석은 기본 작품과 저자에 대해 최소한의 예의를 갖춰야 하는 것이다. 진중권 교수는 트위터에 "저자도 책을 썼으면, 해석에 대해선 입을 닥치는 게 예의"라고 말했지만, 표현의 자유가 있다면 '지켜야 할 선'도 있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소원의 소재원 작가의 말을 인용하자면 "창작의 고통을 모르는 평론가 따위의 말장난"이라는 말처럼,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는 브라질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었고, 심지어 어느 정도의 사실을 기반으로 한 소설에서 조차 작가가 해석에 대해 '닥치고' 있어야 하는걸까?
대중문화 속 대중가요는 '예술'이 아니라, 하나의 상업적 컨텐츠일지 모르나, 예술의 하나인 순수 "문학"에서 모티브를 차용한 것이라면 그 상업적인 이용에 더 신중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상식은 사람마다 그 정도가 분명 다르기에, 상식적인 수준에서 재창작을 해야 한다는 말도 어폐가 있을 수 있겠지만, 최소한의 배려는 필요하지 않을까.
2. 아이유의 컨셉 '소아성애'
두 번째 이야기 시작부터 다시 진교수님의 언급을 인용하자면, "망사 스타킹이 어쩌구 자세가 어쩌구. 글의 수준이란.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어휴. 포르노 좀 적당히 보세요."라는 아주 적나라한 비판을 했는데, '소아성애'에 대한 이야기가 꼭 그러하다. 아는 만큼 볼 수 있는 것이다. 꽤나 오랫동안 아이유의 팬임을 자처(?)한 나 조차도 이번에야 비로서 그간 아이유의 앨범 컨셉에서 그러한 '메타포(Metaphor)'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결론을 먼저 이야기 하자면, 아이유가 '소아성애자'라는 것이 아니라 아이유가 낸 앨범의 컨셉이 '소아성애'의 욕구를 가진 이들의 욕구 혹은 욕망을 알게 모르게 자극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제까지 아슬아슬 선을 넘지 않았던 것이 이번 Zeze 사건으로 선을 넘어가 버렸고, 이 수 많은 논쟁을 초래하게 된 것이라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위에서 이야기했던 문학의 재해석에 대한 이야기는 찬/반으로 논의될 수 있는 수준이고 그 논의에 정답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소아성애'는 분명한 범죄이기 때문에 아이유의 앨범에서 여지껏 보여져왔던 메타포를 대중은 알아야 한다. 아이유가 이제껏 꾸준히 (어쩌면 은밀하게) 드러내온 메타포를 통해 그 자신은 (그것을 알고 그랬는지, 모르고 그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미필적 고의와 필적 고의와의 차이 수준일 뿐) 대중의 스타가 될 수 있었을 지 모르지만, 학대 받는 다른 피해자 아이들을 만들어 냈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단순 이러한 메타포를 통해 사회에서 소아성애 피해자가 발생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비약이라고 누군가는 반박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고의였던 그렇지 않던 꽤나 많은 indicator들이 이 주장을 지지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는 사실은 대중이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소아성애'는 분명 아는 만큼 볼 수 있는 것이지만 몰라서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은 꽤나 위험한 발상이다. 20세기 초 영화는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역할을 했던 적이 있었다. 또한 지금의 의무 교육시스템(미국/영국의 공립학교)은 산업화 시대 '노동자를 생산하기 위한 최적의 시스템'이라는 주장도 있다. 사람들은 그것의 실체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서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그저 현상 이면의 것을 보기 힘든 의식 수준을 갖게 된다는 것인데, 어느 체제에서나 지배 계급이 원하는 '무지몽매한 민중/대중'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이유라는 노래 잘하고 재능이 넘치는 가수가 이러한 논란의 이슈에 중심이 되는 것이 안타깝지만, 옛말에 오이가 익은 밭에서 신발을 고쳐 신지 말고, 오얏나무 아래서 관을 고쳐 쓰지 말라(과전불납리 이하부정관, 瓜田不納履 李下不整冠)라는 말처럼 현재까지의 메타포들이 엄청난 우연의 결과라고 할 지라도 의심을 사지 않는 방향으로 음악 활동을 한다면 좋겠다.
추가로, 해당 분야는 내가 잘 알지 못하는 관계로 아래 웹에 잘 정리해둔 링크를 덧붙인다.
http://smire0701.blog.me/220532395086

http://m.ppomppu.co.kr/new/bbs_view.php?id=freeboard&no=4460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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